응용행동분석의 단상
응용행동분석은 자폐인들에 대해서 감각을 자극하여 사회통념을 주입시키는 일종의 폭력이자 상술이다.
특히, 이는 자폐인을 동물로 간주하고 훈련시킨다는 점이 매우 심각한 점이다.
스키너의 실험에 의하면, 쥐가 버튼을 눌러 먹이가 나오면 그 강화물을 통하여 조건화가 형성된다는 조작적 조건화 실험이 존재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행동주의에 대한 것들을 고찰해야 한다. 사실, 행동주의는 행동주의가 아니다. 원래는, 파블로프에 기반한 신경생리학의 분과일 뿐이다. 실제로, 파블로프는 무조건 반사인 먹이를 주는 실험에, 메트로놈 소리를 들려주면, 그 메트로놈이 대뇌피질의 뉴런 세포들에 의하여 조건반사로 형성이 되어서, 계속 강화하면 조건화가 된다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 행동주의자들은 이러한 뉴런 세포의 가설을 부인하였다. 역으로, 그들은 강화와 보상, 조건과 처벌이라는 메커니즘으로 인간 행동을 수정하는데 고군분투하였다.
대표적으로, 반두라의 보보인형 실험의 경우가 있다. 비고츠키는 인간의 산만성은 선천적으로 인간에게 기인한 사회성과 언어의 교육을 통하여 개선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반두라는 단순히 폭력에 노출된 아동들이 폭력성이 상당하다는 연구결과를 통하여, 인간이 환경에 구속을 받고 그렇기에 폭력에 노출된 아동을 마치 가해자로 강제하여 강제로 치료해야 한다는 어불성설의 논리를 형성하는 것에 일조하였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가정폭력을 당한 70%의 사람들이 학대를 반복하지 않았다, 이는 즉 비고츠키의 말처럼 협동과 교육을 통하여 산만성과 충동성, 폭력성이 결국 퇴보한 것이다.
스키너에 대해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스키너의 경우, 신경심리학 등 뇌를 필두로 한 심리학에 있어서 부정적 견해를 표명하며, 오직 강화와 보상과 처벌, 조건에만 집착하였다. 사실, 이는 실험관찰에 의해 형성될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역사적으로 이미 파악되고도 남아야 할 이론이었다. 예를 들어서, 빵 하나에 영혼을 판다는 것은 빵이라는 보상, 즉 돈에 자신의 양심을 판다는 의미이다. 또,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입각하여 빵 하나를 얻기 위해 불불노동, 자신의 노동가치를 판매하여 자본가는 잉여가치를 획책하고, 그 약간의 보상으로 불량한 빵을 받는 것으로도 표현 가능하다.
아니, 파블로프는 자신의 실험실에서 “본능”이나 “심리”에 대해서 거론하면, 벌금을 부과하거나 급기야 총을 들고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하여, 연구원들이 이러한 행동을 반복하지 않았다. 이런데도, 스키너가 부각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이렇다. 마르크스는 사회문화적으로 맥락을 파악하고, 추상에서 구체를 통하여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으로 환원하였다. 가령, 마르크스는 인간 심리에 대하여 뇌를 필두로 하면서, 산업의 발달과 불가분적 존재라고 하였다. 이는 인간 의식의 토대인 두뇌를 근본으로, 인간 심리가 고등한 산업의 발달을 맥락으로 그 안에서 파악하면 된다는 의미이다. 가령, 인간이 우울증을 느끼는 이유는? 그것은 고등한 두뇌라는 토대에 기반하여 인간이 산업에 있어서 잉여가치를 박탈당하고, 자본주의 하에서 다양한 정치적 갈등이나 불합리성에 기반하여 갈등이 발생한다.
그에 비해 부르주아 심리학 내지 의학은 어떠한가?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분류해서 설명하려고 한다. 원래, 비고츠키는 분화에 대해서 전체적 큰 맥락에서 분화한다는 것을 통해, 아동이 감각하고 지각하는 것이 큰데, 이것이 분화된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부르주아 학자들은 국소적 단위까지 쪼개어 분류하고 각자를 개별적으로 파악하는 것에만 집착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들은 아동이 탄생하면 기초적으로 반사를 통하여 감각을 차례차례 가진다는 것으로 비고츠키와 상반되게 설명하고 있다.
가령, 심리를 예로 들어보자. 부르주아 심리학에서 만약에 인간이 소외감을 느끼면? 마르크스주의 심리이론에 의하면, 사회적이라는 토대 하에서 인간의 소외와 무한한 갈등 등이라고 설명한다. 그에 비해, 부르주아 심리학에서는 인간 자체를 개별적으로 분류하고, 그 인간에게 호르몬 내지 유전, 세균 혹은 미생물 등이라고 낙인하고, 또 그 인간을 타자와 연결되는 사회적 존재가 아니라 개인으로 간주하고 개인이 잘못하였기에 그 개인만 변하는 치료를 해야 한다고 낙인한다.
교육과 자폐인
비고츠키와 루리아에 의하면, 본래 학교는 구태의연한 질서와 폭력을 탈피하기 위해 서로 사회적으로 연대하고 교육을 하는 장소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학교는 어떤가? 서로 왕따와, 게임 같은 저급한 하류의 대화, 그리고 논리와 지성 그리고 감정의 조화가 아니라, 감정을 빙자한 충동과 폭력만 난무하는 현장이다. 한 학생이 화가 나면, 왜 화가 났는 지 생각하고, 서로 대화를 통하거나 중재를 통해 해결하면 된다. 그렇지만, 학생들은 화가 나면 폭행을 하고 악행을 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이는 분할통치 때문이다. 분할통치란 서로 적대적인 편을 형성하여, 가령 진보, 보수처럼 서로 공격하는 적대적 세력을 형성하여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불만을 양측 진영 논리로 회피하여 거기에만 집중하게 하여 본질을 흐리게 한다.
교사는 학생들을 통제하기 위해, 진영 논리를 설정해야 한다. 그 피해자이자 희생물은 약자, 특히 소위 폐급이라고 불리는 자폐 스펙트럼이 될 수 있다. 이들이, 대화가 불통이거나 눈치가 없거나 학습이 지체된다고, 느린 학습자라는 이유로 이들을 면박하고 구박하고, 학생들에게 낙인한다. 학생들이 자폐 스펙트럼 학생 당사자를 무시해도 된다는 것은 교사를 통해 습득하게 되고, 이들 역시 자신과 차이나는 학생을 공격하게 된다.
또한, 지속적인 학교 경쟁에서 낙오된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 학생들은 마치 자신들이 자폐 스펙트럼이어서 그래서 되지 않았다고 낙담한다. 심각한 경우, 정신분석 용어를 사용하면 자신들의 자폐 스펙트럼의 소중한 정체성을 거세하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에게는 어떠한 교육을 해야 하는가? 그것의 해답은 명확하다. 이들은 치료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비 자폐 스펙트럼 사람들이 자폐 스펙트럼을 이해하면 된다. 그 이유로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 역시 공동체의 일원이고, 서로 상호 호혜적으로 사용과 교환가치에 따른 언어소통과 관계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자는 사용가치로 화자를 만나고, 화자는 교환가치로 청자를 만난다. 마치, 소비자는 사용가치, 즉 물건을 사용할 가치가 있는 지 상인을 만나고, 상인은 교환가치 즉 소비자가 가진 돈이나 물건으로 자신의 물건을 교환할만한 가치가 있는 지 판단해서 만난다.
이처럼, 언어생활도 예를 들어서 지갑에 대해서 대화를 하면, 청자는 사용가치 즉 자신이 지갑에 대해서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그 가치를 위해서 대화하고, 화자는 교환가치 즉 지갑을 권유하여 그 사람이 지갑이 있어서 편할 수 있다거나, 혹은 나중에 그 사람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도 있는 상호호혜적 관계이다.
자폐 스펙트럼도 그렇다. 가령, 자폐 스펙트럼 학생이 코딩을 잘하게 되면, 비 자폐 당사자 학생들은 그 학생을 존중하여 자극이나 그런 것들을 줄이는 대신,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 학생은 자신의 코딩 능력을 통하여 학생들과 협동할 수 있다. 마치, 교환 거래 관계가 형성된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역으로 응용행동분석을 통하여 자폐 스펙트럼 당자사를 자극하고, 일방적으로 정상적이라고 낙인한 비 자폐 당사자 학생들을 위해 행동을 수정한다. 마치, 자신의 소중한 자폐 스펙트럼 정체성을 거세하듯이 말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관계에서는 교환과 거래가 아닌, 일방적으로 자폐 스펙트럼 당사자 학생들이 비 자폐 당사자 학생들에게 거래를 강매당하고, 이들을 위해서 일방적으로 재능을 착출해야 하는.. 마치, 레닌의 제국주의론과 마르크스의 식민주의 이론을 방불케 한다.